[APEC 이해하기 3] 다극화 세계를 향해
글: 지오바니 바스티다(콘텐츠팀, ISC)
번역: 이재오(번역팀, ISC)
지난 “APEC은 무엇인가”, “글로벌 가치사슬의 탄생”에 이어 이번 기사에서는 단극 국제 질서에서 다극 국제 질서로 전환되어가는 지각 변동을 분석하고자 한다.
트럼프의 관세 전쟁은 미국이 경제 패권을 휘두르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다극화 세계로의 전환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조치로도 볼 수도 있다. 미국 패권의 비전은 이제 더 이상 전 세계적으로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와 세력권을 고착시켜 다극화 질서를 더 잘 견디기 위해 후퇴하고 있다. 이 현상은 트럼프로 인해 가속하고 있지만, 트럼프가 이를 유발한 것도 아니고, 그 혼자서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도 아니다.
금이 가기 시작한 미국 주도 세계 질서
2008년 금융 위기는 세계 질서에서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미국 주도의 G7 국가들은 세계 금융 위기에 맞선 해결책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위기의 해결을 위해서는 중국을 비롯한 남반구 신흥국들의 노력, 자원,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과 중국으로 구성된 G2, G7과 남반구의 주요국으로 구성된 G20이 등장했다. 경기부양책, 무역장벽 거부, 금융 개혁을 통해 G20은 “자유 낙하를 하던 세계 금융 체제를 구조했다.” 그러나 세계 경제가 회복하자 북반구는 국제 질서의 중심을 다시 G7으로 돌리며 원상 복귀를 추진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북반구가 더 이상 세계 경제를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이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남남 협력의 확대로 이어졌다.
중국의 귀환
중국은 글로벌 가치사슬의 맨 아래에서 시작했음에도 전략적 정책을 통해 무역 흑자를 축적하며 대안적 생산 중심지로 부상했다. 1990년대의 시장 개혁으로 글로벌 자본주의 가치사슬로 편입한 이후 중국의 GDP는 10배로 뛰었다. 오늘날 중국의 제조업은 서방을 대체했다.
2008년 위기 당시 남반구는 북반구가 세계 경제를 조정할 수 없다는 것을 목격했고, 다양한 남남 협력 구상이 나타났다.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으로 구성되어 2009년 출범한 BRICS는 2023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이집트, 에티오피아 등을 포함하여 BRICS+가 되었다. 이를 통해 특히 에너지 시장을 중심으로 세계 경제에서 BRICS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서방 주도 기구들에 맞서는 대항 축으로서의 역할도 강화되었다. 남반구 국가들의 연대는 오랜 기간 미국이 주도해 온 기구들과 경쟁할 평행적 경제 금융 거버넌스 체제를 만들어 가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이끄는 유라시아 정치 경제 안보 그룹인 상하이협력기구(SCO)는 2001년 출범 이후 무역, 투자, 경제 개발에서의 협력을 확대할 방안을 논의해 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SCO는 한층 더 강화되었고, 회원국들은 “러시아와 더 긴밀하게 경제 관계를 맺었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가 석유 수출에서 달러를 사용하지 않고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 국채 매입을 줄이면서 세계화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
마지막 기둥: 미국의 군사력
이매뉴얼 월러스타인의 이론에 의하면 패권의 상실은 생산, 금융, 군사의 세 단계에 걸쳐서 진행된다. 첫째로, 미국 생산의 붕괴는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몰락에서 잘 드러난다. 포드 T 모델 생산 라인으로 대량 생산의 시대를 열어낸 도시는 이제 미국 탈산업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시가 되었다. 미국은 1979년부터 제조업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했지만, 같은 시기 중국은 개혁 개방을 통해 경제가 급성장했다. 냉전 시기 소련을 상대로 미국이 느꼈던 불안은 이제 중국을 향하고 있다.
미국의 금융 패권은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와 IMF, 세계은행, WTO 지배로 유지되었지만, 갈수록 큰 압박을 받고 있다. BRICS+의 대체 결제 시스템 모색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인프라 자금 지원은 미국이 통제하는 기구들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구체적 시도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UAE의 BRICS+ 가입은 석유 시장에서 달러의 지배력을 위협하고, 위안화로 결제되는 석유 거래는 페트로달러의 입지를 약화하고 있다. 아직 미국이 금융을 지배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조금 더 다원적인 금융 질서를 향한 점진적인 변화를 나타낸다.
생산과 금융에서의 패권이 약화했음에도 미국은 아직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의 연간 군사 예산은 1조 5천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제조업과 금융에서의 지배력을 상실한 미국은 그 지위와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신냉전을 벌이고 있다. 1조 5천억 달러의 군사 예산으로 미국은 전 세계적인 군사력 투사 능력을 얻는다. 항모 전단, 신속대응 공수여단, 세계 각지에 있는 전진 기지 등을 통해 미국은 항공기와 병력을 포함한 전투 자산을 24시간 내 세계 어디든 전개할 수 있다.
포위와 동맹
미국은 군사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문제를 강제로 해결할 지렛대로 삼는다. 미국의 전술은 미국이 지배하는 미디어를 사용한 정보전부터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기구를 이용한 하이브리드 전쟁, 그리고 대리전까지 아우른다. 미국이 추진하는 대리전의 예시로는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막대한 지원, 그리고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두고 “중동에서 이란에 맞선 가장 중요한 우방”이라고 언급한 것 등이 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전략은 중국을 포위하고 압박하는 정책과 입장으로 동맹국(한국, 일본, 필리핀 등)을 몰아넣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는 2017년 한국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사드)가 배치된 것이다. 미국은 북한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THAAD의 레이더는 중국 본토 깊숙이까지 탐지할 수 있다. 미국의 요구에 순응함으로 한국은 중국과의 대결에 내몰리게 되었다.
신냉전의 경제 부문에서도 이런 중국 봉쇄 접근법은 계속되었다. 미-중 갈등은 주로 트럼프와 연관되지만, 처음으로 중국산 물품에 관세를 매기고 중국을 제외한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을 추진한 것은 오바마였다. 바이든은 이후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와 미국 산업을 재건하기 위해 반도체 산업과 동맹국의 공급망을 지원하는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을 통해 중국 봉쇄 기조를 이어 나갔다. 트럼프의 관세는 중국 제조업에 맞선 계속되는 전쟁을 격화할 뿐이다.
남반구에 가장 중요한 투쟁은 서방의 간섭에 맞서 주권을 지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남북 평화 구축 노력이 지금까지처럼 미국에게 포섭되거나 방해당하는 것을 막고 주권을 되찾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전 세계적 신냉전이라는 이 폭넓은 대결 구도 속에서 패권에 맞서 권리를 되찾고 독자적인 평화의 길을 찾아 나아가는 데는 국제 연대가 필수적이다.